헬리콥터 부모는 자녀 주위를 맴돌면서 자녀의 작은 필요에도 민감하게 반응하고, 일거수일투족 세심하게 신경 쓰는 헌신적인 부모다. 과연 그런 부모의 극진한 보호를 성인이 된 자녀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그런 양육법에 감사를 표현할까? 미국 뉴스 웹사이트인 레딧에 올라간 이 질문에 2천개가 넘는 답글이 달렸다고 한다. 많은 이들이 호소한 것은 감사가 아니라 고통과 답답함이었다. 지속적인 악영향 많은 이들이 성인이 되어서도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다고 응답했다. “저는 제가 다른 사람에 의해 움직이고, 조종되는 것 같은 느낌이 싫어요” “저는 제가 무슨 일을 하든지, 심지어는 일상생활 속에서도 제가 감시당하고, 관찰 받는다는 느낌이 싫어요.” “제가 어떤 직업을 갖고 일하든지, 저는 제가 무언가를 망쳐서 사람들에게 실망을 주지 않을까 계속 두려움을 느껴요. 저는 솔직히 말하면, 마비된 것 같아요” “저는 자라오면서, 저의 사생활이 존재하지 않는 게 정상적인 삶이라고 생각했어요” “불안하고, 숨이 막힐 것 같아요. 헬리콥터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비정상적인 기대를 가지고 있고, 그들의 자녀들은 이미 성인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길 거부해요.” “저는 집에서 나온 지 수년이 지났지
코로나 상황이 급속히 악화되면서 교회의 공예배가 다시 온라인(가정예배)로 전환되었습니다. 그만큼 가정에서의 예배가 더욱 중요해졌습니다. 부모의 제사장 역할과 가정이 성소로 회복되는 일이 더욱 신속히 진행되어야 한다는 뜻 같기도 합니다. 이 기회에 부모님들이 예배에 대한 성경적 이해를 분명히 한다면, 가정에서의 예배가 더욱 든든히 세워질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배의 핵심을 목사님의 설교를 듣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배를 이렇게 수동적 청취 행위로만 보면 사실 현장에서 드리는 대면예배나 온라인 비대면예배가 큰 차이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배는 예배자의 적극적인 참여를 동반하며, 그 참여는 방향성을 가집니다. 예배학자 로버트 웨버는 ‘예배는 동사다 Worship is a verb‘라는 말로 이를 표현했습니다. 먼저, 예배에는 수직적인 방향성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로 내려오시고,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올라가는 쌍방향 소통이 바로 예배입니다. 하나님이 예배 가운데 약속과 구원의 말씀, 성찬과 축복의 말씀으로 찾아오십니다. 우리는 그에 대한 응답으로 믿음의 고백과 찬양과 감사와 송영과 기도 가운데 하나님께로 올라갑니다. 시편 기자들은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성경은 남자와 여자가 동등함을 강조하지만 각각 고유한 역할과 책임을 가지고 있는 것도 말해줍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페미니즘의 영향으로 남자와 여자가 동등하다는 데만 방점을 두고 남녀의 다름을 별로 중요하지 않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남녀의 차이를 알면 서로를 이해하는 것이 더 쉬워집니다. 저는 유교적인 가정에서 자라서 뼛속깊이 유교문화가 베여있는 사람인데, 저희 집사람은 신학을 공부해서 남녀가 동등하다고 믿는 진취적 여성입니다. 신혼 초에는 성경해석을 가지고도 밤을 세워가며 격렬하게 토론을 했습니다. 집사람이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엡5:21)’는 말씀을 가지고 상호복종을 이야기하면, 저는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 칭하여 순종한 것 같이 하라’는 벧전 3:6말씀을 들이대며 남편의 권위를 주장했습니다. 성경은 여기에 대해 뭐라고 말할까요? 창세기 2장으로 가 보겠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창2:18) ”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
성경에는 결혼과 가정에 대한 말씀이 많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부터 가정을 만드신 이야기가 있고(창2장), 예수님이 첫 기적을 행하신 것도 가나의 결혼 잔치에서였습니다(요2장). 계시록을 보면 세상의 마지막에도 어린양의 결혼잔치가 있습니다(계19장). 성경은 결혼에서 시작해 결혼으로 끝난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가정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제도이고, 복의 통로이며, 하나님 나라의 기초단위입니다. 그럼에도 오늘날 많은 가정들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가정의 복을 풍성히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가정이 작은 하나님 나라가 되기보다 엉킨 실타래처럼 풀리지 않는 혼돈과 고통의 근원인 경우가 많은 현실입니다. 물론, 세상에 문제없는 가정은 없습니다. 문제가 있다는 것은 변화와 회복을 꿈꿀 수 있다는 말입니다. 가정이 어떤 모습으로 회복되어야 하는지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가정의 원그림을 살펴보아야 알 수 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가정에 대해 원래부터 품고 계셨던 원그림은 무엇일까요? 그 답을 창세기 1장과 2장의 창조이야기에서부터 찾아가 보겠습니다. 1. 동등한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남자와 여자 먼저, 성경은 남자와 여자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동등하게 창조되
우주는 어떻게 생겨나게 되었는가: 모세오경과 과학 최재언 기자 편역 (원문 기사: How the Universe Came to Be: Torah and Science) 성경에 믿기지 않는 것들 중에 많은 것들이 과학과 관련된 내용들입니다. 자녀들이 –진화론과 같은- 성경과 상충되는 과학 지식을 물어볼 때 난감하시지 않으신가요? 그 중, 우주의 기원과 관련된 역사를 들려드릴까 합니다. 종교가 경전의 해석을 과학적 연구결과에 사후적으로 끼워 맞춘다는 비판을 받지만, 최소한 ‘우주에 시작이 있다는 사실’ 만큼은 과학에서 영원불변한 우주를 주장했을 때에도 성경에서 주장해왔다는 글입니다. 이는 오늘날 기독교계에서 창세기를 해석하는 관점과도 연결됩니다. 대다수의 신학자들은 ‘창세기’에서 가장 명확하게 알 수 있는 사실은 천지에는 ‘시작’이 있고,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주인이라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인류 역사의 대부분의 시간동안 과학자들은 우주가 영원하고 불변하다고 믿어왔습니다. 기원전 4세기의 아리스토텔레스는 세계에는 시작도, 끝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죠. 하지만 이 관점에 대해 ‘우주에는 시작이 존재한다’라는 입장을 가진 반대자들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자녀가 20대까지 가정에서 배워야 할 2가지 최재언 청년기자 1. 하나님의 눈으로 인생을 바라보는 법 하나님이 인생을 어떻게 평가하시는 지에 대해서 교훈을 줬던 이야기가 있다. 친할아버지의 삶에 대한 이야기다. 친할아버지는 가난하고, 초등학교 밖에 나오지 못하셨고, 키도 작으셨다. 트럭 운전수 일을 하시다가 사고를 당하셔서 뇌졸중이 오셔서 말을 제대로 못하게 되셨고 더 이상 일도 하지 못하게 되셨다. 그 이후 술에 빠지셔서, 술에 취하신 할아버지를 가족들이 밖에서 부축하고 돌아온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돌아가시기 7-8년 전부터는 뇌졸중에 더해 심한 치매가 오셔서 우리 가족이 계속 병 수발을 들어드리다가, 나중에는 요양원에서 돌아가셨다. ‘가치, 효용성’의 관점으로 보면 할아버지의 삶은 초라했고, 주변 가족들을 힘들게 했던 측면이 더 컸다. 그런데 아빠가 마지막에 병원에서 할아버지의 임종을 지켜보며 기도를 하다가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한다. “위대한 인생이었다.” 하나님은 할아버지의 삶을 이렇게 평가하셨다. 할아버지에게 주어진 달란트와 환경이 있었고, 할아버지에게 주어진 고유한 ‘믿음의 경주’가 있었다. 우리가 보기엔 말도 하지 못하시고, 말년에
세속화의 물결을 거슬러라! 한국 교회를 잠식한 세속화의 물결은 기독교 가정 또한 점령했습니다. 유럽과 미국의 기독교 가정들이 세속화의 포로가 되어 자손에게 신앙을 물려주지 못하고 무너져 내렸습니다. 유럽과 미국이 비해 기독교 역사가 짧은 한국 가정은 더 빠른 속도로 무너져 내리고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한국의 기독교 가정들의 목표는 ‘거룩한 가정’이 아닙니다. 가정의 부와 자녀의 성공이 목표가 되었습니다. 대다수 기독교 가정들이 가정의 경제와 자녀 입시에 성공했다는 세상의 가정들의 길을 숨 가쁘게 따라가고 있습니다. 그럼으로써 기독교 가정들이 세속화의 수렁에 깊이 빠지게 되었습니다. 믿음의 길이 아니라 세상이 달려가는 길을 힘을 다해서 따라가고 있는 실정입니다. 기독교학교에 아이들을 입학시킨 부모님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내 아이를 신앙적으로 키우려고 기독교학교에 보냈다”라고 말씀하시는 부모님들 중에도 속으로는 기독교학교가 자녀들을 안전하게 성공의 자리에 데려다 줄 거라는 허망한 꿈을 굳게 붙잡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기독교학교의 학부모가 되어서도 세속화의 물결 속에 머물러 있는 부모들은 자녀의 성적 때문에 울고 웃습니다. 그 아이들이 갈 대학의 레벨에서
(후반부) ️♀️ 기독교 가정의 "자녀교육의 핵심"은 무엇일까?, 엄마가 중심을 잡으면 자녀들 "공부"는 결국 따라온다?!, 주변엄마들에 "흔들리지 않고 중심잡아야 하는 이유"를 담았습니다. (전반부) 보스형 아이, ♂️참모형 아이, 하루 종일 싸우는 아이들을 어떻게 교육할까? 언제든지 댓글과 문의주세요. (poweroffamily.or.kr / 02-465-0877) 촬영 및 편집: 나명훈 자막: 우봄
팬데믹 시대의 가정과 교육2. 3부. 제각각인 아이들, 어떻게 지도할까? Q. 말 안듣는 아이 훈련시키는 법? 손자가 한번 왔었는데 먹는 걸 엄청 좋아해요 근데 누가 그 카스테라를 사왔었어요. 얘가 이거를 우유에다 말아서 너무 맛있게 먹고 있었는데 우리 식탁 의자에 앉아서 하니까 의자에 이걸 다 쏟으면 엉망이 되잖아요 그러니까 그 자기 의자 하이체어에 올라가서 이제 먹으라고 그 다음부터 삐져서 안먹는대요 안 먹어? 안 먹는데요. 그럼 배고플 텐데 진짜 안 먹으면 이거 우리 집 개가 마루거든요 그럼 마루 줄까 그랬더니 안 먹는대요. 그리고 그 저쪽에 인제 카스테라가 또 있었어요 근데 지금 안 먹으면 저 카스테라도 안 먹는 거야 이거 안 먹으면 12시까지 아무것도 못 먹는데 배고플 텐데 괜찮겠어 그랬더니 계속 알았어 그렇게 다 얘기하고 개를 줬어요 내가 이렇게 딱 와서 식탁에 앉으니까 저거 카스테라 내놓라는 거죠 그래서 내가 안 돼. 안 먹기로 했잖아 네가 아까 안 먹는다 그래서 마루 줬기 때문에 이거는 지금 못 먹어. 12시 돼야지 먹을 수 있어 이게 무슨 소린지 모르는 거죠 카스테라 또 달라고. 그래서 안 돼 엄마한테도 계속 나한테 호응하라고 그랬어요 계속
하브루타는 이것이다 (1) 김진산 박사 유대인의 종교 교육에 관한 수많은 정보들 가운데 최근 자주 회자되는 내용이 하브루타 교육이다. 특히 한국 교육현장에 적용되고 있는 하브루타 교육은 ‘질문이 있는 교실’ ‘질문을 잘하는 똑똑한 우리 아이’ ‘부모와 자녀의 소통’ 등 질문이 있는 토론문화를 활성화하는 교육환경을 조성하는데 기여하고 있다. 하지만 토론을 위한 하브루타 교육이 아니라 학업성취나 경쟁우위를 위한 도구로 전락되고 있는 현실도 부정할 수 없다. 한국 사회에 알려진 하브루타 교육은 유대인의 성공신화를 따라 자녀들을 가르치고 싶어하는 부모들의 열망때문에 교육현장에 적용되고 있는 실정이다. 몇몇 교육학자들은 하브루타 교육에 대한 연구물들을 내놓고 있지만 유대인의 종교와 문화, 전통과 역사 등을 교육과 연관하여 창의성 교육 체제 관점에서 연구하고 분석한 논문이나 저서는 찾아보기 힘들고 그 내용도 단편적이며 현 교육 시스템에 한정되고 있다. 종교와 문화, 전통과 역사를 중요시하는 유대인들은 쉐마교육, 절기교육, 가정교육, 회당교육을 활발하게 펼치면서 창의성을 발전시켜왔다. 특히 유대인의 창의적인 사고나 삶의 양식은 수천년 동안 대를 이어 가르치고 전수하고 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