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저널

안다 모른다 더 알고자 하자

 

정갑신 목사(예수향남교회) 

 

생각지 않게 발생한 사건들도 풍랑일 수 있지만, 내 존재를 흔드는 관계들도 맞서기 버거운 풍랑입니다. 그리고 가정은 늘 이런 풍랑들에 시달립니다. 하지만, 풍랑을 어떤 마음과 자세로 이해하고 맞이하느냐에 따라, 그것은 나를 삼킬 수도 있고 단단하게 키울 수도 있다는 걸,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풍랑을 맞이하는 마음과 자세는 내가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알고 있느냐, 하나님을 과연 어디까지 믿고 있느냐에 따라 현저히 달라집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권면을 따라, 바다 같은 갈릴리 호수를 건넙니다. 이들 중 다수는 뱃사람 출신이고, 어린 시절부터 갈릴리에 익숙합니다. 하지만 불현 듯 만난 이번 풍랑은 좀 비상하였습니다. 과거에 경험해보지 못한 위력을 지녔거나, 과거의 경험에 의하면 사람을 죽일 게 분명한 풍랑이었습니다. 제자들은 당황했습니다. 그리고 할 수 있는 모든 조치가 소용없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그 때 비로소, 예수님이 주무시고 계시다는 걸 알게 됩니다. 얼마나 황당하고 짜증스러웠을까요? 그들은 예수님을 격하게 깨웁니다. 그리고, 일어나신 예수님은 즉시 풍랑을 잠잠케 하십니다. 그 때, 제자들의 고백은 이것이었습니다.

 

 

‘대체 이 분이 누구시길래 이런 풍랑까지 지배하시는가?’... 제자들의 고백을 다른 말로 바꾸면, ‘우리는 이 분을 꽤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분이신 줄은 미처 몰랐네’... ‘안다고 생각했지만 몰랐네’... ‘이 분이 이런 분일 줄 미리 알고 있었더라면, 풍랑 앞에서 다르게 반응했을텐데...’. 

 

풍랑 앞에서 우리가 보이는 태도는, 예수님과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알고 있느냐와 결정적으로 연관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는 어느 정도는 알고 있다고 생각할 지도 모릅니다. 혹은 꽤 안다고 자부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앎의 깊이와 넓이는 내 생각이나 말이 아니라, 현실의 풍랑 앞에서 보이는 태도를 통해 명백하게 드러납니다. 풍랑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가, 우리의 진짜 앎을 나타내는 표지입니다.

 

 

언제부턴가 막내딸에게 가끔 이렇게 말하곤 합니다. ‘아빠가 너를 잘 모른다는 걸 인정할게. 동시에 어쩌면 그래서 너를 잘 못 믿는다는 것도 인정할게. 아빠가 아빠 자신을 믿지 못하겠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아빠는 너도 잘 믿지 못하는 것 같아. 하지만, 언제부턴가... 아빠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확실히 믿을 수 있게 됐기 때문에, 이제는 너에 대한 하나님의 뜻도 확실히 믿으려고 해’..

 

딸에 대하여, 내가 이미 너를 충분히 파악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싶어 하는 마음에, 더 이상 의지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딸에게는 내가 모르고 있는 다른 많은 모습들이 있다는 걸 인정하려고 힘씁니다. 그래서 딸을 더 알아가려고, 또 이전보다 더 귀를 기울이려고 애쓰게 됩니다. 동시에, 나에게까지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지만, 하나님께는 이미 딸을 향한 선하신 계획이 있다는 분명한 사실을 믿기로 결정합니다. 그 때 저는 생각보다 훨씬 깊은 샬롬을 누립니다. 다소의 여유로움을 맛보고, 비교적 관대하게 딸 앞에 있는, 모든 내일의 길들을 더 잘 기다릴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을 느낍니다. 

 

 

최근 TGC 홈페이지를 통해, 의미 깊은 컬럼을 읽었습니다(우리나라에서는 TGCK 홈페이지를 통해 읽을 수 있습니다). 내러티브의 세상에서 리얼리티에 헌신하라!...라는, 수석 편집자의 글이었습니다. 그 분이 말하는 내러티브는, 편견으로 기울어져 굳어진 이념적 확신으로 읽힙니다. 온 땅에는 그런 내러티브들이 충만하다는 것입니다. 소위 진영논리 같은, 이념적으로 확증 편향된 담론들로 온 땅이 온통 물들어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분이 말하는 리얼리티란, 진실과 사실 자체에 다가가려는 객관적인 노력들, 신중한 통계, 실험, 고민, 솔직하고 폭넓은 대화 등을 통해 얻게 되는, 최대한 실재에 근접한 무엇입니다. 그런데, 리얼리티에 가 닿기도 전에 내러티브에 갇히는 현상은 좌나 우, 진보나 보수를 막론하고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복음으로 세상을 향한다고 할 때, 복음이 리얼리티에 제대로 접촉하게 하는 과업을 가지는 겁니다. 하지만 복음이 리얼리티에 가 닿기도 전에, 수많은 내러티브들 곧 확증 편향된 담론들에 가로 막히거나 묻혀 압살 당한다는 겁니다, 

 

사람들은 왜 리얼리티에 가 닿으려 몸부림하기보다 내러티브에 손쉽게 속하려는 걸까요? 저자에 따르면, 우리가 고민과 수고를 싫어하고 쉽고 빠르게 자신의 입장을 정리하여, 자신의 안전한 입장을 지키려는 욕망에 길들여졌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쏟아지는 초광속의 수많은 정보들 틈에서 판단을 유보한 채, 고민하면서 대화로 풀어가는 애매하고 길고 복잡한 시간들을 부담스러워한다는 것입니다. 더구나 우리는 자신이 틀렸다는 걸 인정해야만 하는 상태를 매우 불안정하게 생각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리얼리티가 자신의 명백한 오류를 드러내는 순간에도, 여전히 자신이 속한 혹은 속하기로 작정한 내러티브들을 앞세워 리얼리티를 거절하거나 멸시한다는 겁니다. 자신이 옳지 않다는 게 드러나면 세상과 함께 망할 것처럼 두려워할 만큼, 우리는 크고 위대하신, 신실하고 완전하신 하나님에 대한 단단한 믿음을 소유하지 못한 것입니다. 

 

 

자녀와 배우자에게, 그리고 가정 안에서 누군가를 향할 때, 우리는 어떠합니까? 이미 내 안에서 그를 익히 알고 있다고 전제하는 일정한 프레임이, 그에게 경청해야만 하는 시간을 생략시키지는 않습니까? 더 이상 알고 싶지 않다고 내세우려는 말 속에는, 자신의 확증 편향된 의심과 두려움의 담론들만 가득한 건 아닐까요? 알지만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함으로 더 알고자 하는 성실한 자세가, 언제쯤이나 실감나게, 우리 각 자의 삶을, 제대로 통과하게 될까요?

 

(가정의 힘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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