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보 인생은 없다. 그저 그런 삶도 없다.

 

(주)도움과나눔 최영우대표.

가정의힘 교육위원

 

 

1960년대 초 부모님은 경남 의령에서 결혼하고 나를 낳고 난 이후 바로 부산에 정착했다. 그야말로 숟가락 하나 들고 감행한 이농이었다. 팍팍한 살림에 둘째 아들이 태어나자 어머니는 큰 아들인 나를 외가가 있던 의령군 백암으로 보냈다. 3-4살에서 초등학교 입학 때까지 외할머니와 이모들 곁에서 자랐다. 나이 어린 이모들이 장난이 심했다. 외할아버지의 담배대를 꼬마에게 빨게 했다. 어른들이 동네에 하나밖에 없는 점방(구멍가계)에서 사준 눈깔사탕을 이모가 약탈(?)하려고 해서 내가 집어 던졌던 기억이 난다. 대청마루로 데굴데굴 굴러가는 눈깔사탕.. 큰 사랑을 받았다.

 

또래 동네 아이들과 함께 머리에 부스럼이 심해져서 마을에서 집단으로 5일장에서 사서 발라준 피부약이 군데군데 흰머리를 만든 것은 할머니의 아픔이었다. 나는 학창시절 내내 흰머리가 부끄러웠다. 나는 초등학교 내내 외할머니가 보내 준 검정깨를 먹어야 했다. 할머니는 그 때문에 평생 나를 위해 기도하셨다.

 

 

마침 그 동네에 외가 사랑방에서 시작한 작은 교회가 활발한 상태였고 외할머니는 나를 업고 교회를 다니셨다. 할머니 등, 교회 가는 밤길의 정자나무, 교회 문 앞의 신발들, 가마니로 깐 교회 바닥, 절기 때 나누어주던 오렌지색 프라스틱 바가지가 기억이 난다. 대학생 때 서울로 이주한 할머니집(외삼촌집)에 지쳐서 가끔 갔다. 새벽 잠결에 할머니의 기도소리를 들었다. "아버지... 우리 영우.." 평생을 외손자를 위해 기도하신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내가 소위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만난 계기가 된 말씀도 할머니 집에서 뒹굴뒹굴하면서 읽게 된 말씀이었다. "너희를 불러 자신의 아들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로 사귀게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 40이 넘어 할머니의 임종 때에 깊이 기도해드렸다. 내가 태어난 친가가 있던 낙서라는 마을에 외가가 있던 백암보다는 거의 20년 이나 지나서 연약한 교회가 생겼다.  

 

어린 시절 4년 가량 부모와의 분리 경험은 내게 큰 어색함을 만들었다. 문제아는 아니었지만 어머니에게 평생 데면데면했다. 고등학교 때 신앙생활을 시작하게 된 나를 못마땅하게 여기셨던 어머니는 직장생활을 시작한 청년이 되어서 교회를 나가기 시작하셨다. 그때부터 신앙에 열심이었다. 젊은 시절 어머니는 점쟁이들의 말에 영향을 받는 선하지만 연약한 영혼이었다. 내가 예수를 믿어서 집안의 촛불이 꺼져간다고 어머니는 생각하셨다. 이웃들에 따뜻한 선을 베푸는 선하고 지혜로운 분이었다. 

 

 

담도암으로 60대 초반에 너무 빨리 하늘 나라에 가셨다. 내 아들은 가끔 "할머니는 왜 나를 그렇게 사랑했어?"라고 물었을 만큼 아이들에게 사랑을 주셨다. 투병 1년의 기간 어머니와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아내와 어머니 사이에도 추억이 쌓였다. 아내는 어머니가 쓰시던 옹기항아리 하나만 유산으로 챙겼다. 아직도 우리 집의 쌀독으로 쓰고 있다. 너무 일찍 가신 어머니는 장례식 며칠 뒤 아내의 꿈에 나타났다. "고맙다. 나는 좋은 곳으로 간다"하며 활짝 웃는 모습을 보여주셨다고 한다. 아내에게 큰 선물이었다.

 

담도암 수술 후 병원에서 회복 중 새벽에 어머니를 찾았는데 답답하셨는지 병원 정원에 나가계셨다. 다가가는 나를 바라보면서 지어주셨던 미소가 아직 내 마음을 든든하게 한다. 담도암 발병 초  김포공항에서 처음 만난 어머니가 황달로 노래진 얼굴로 지어주시던 어색한 미소와 달랐다. 자주 어린 시절 나를 시골로 보낸 것에 대해서 미안해하셨다. 어머니 가시고 난 이후 사진 한 장을 발견했다. 부산 사상역 철길에서 어머니가 나와 남동생과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 내가 살이 통통하게 올라있는 것을 보고 어쩐지 내 맘이 짠해지고 따뜻해졌다. 어머니는 최선을 다했다.   

  

 

어머니 돌아가시고 홀로 남은 아버지를 내가 모실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아내가 형제들에게 "그러면 우리 방 4개짜리 아파트로 이사가게 도와줘. 아버님 우리가 모실께..."하고 정리했었다. 10년을 우리 집에서 보내셨다. 3년은 건강하고 행복한 동거였고 7년은 뇌경색에 이은 치매로 고생하셨다. 집에서 차로 30 분 거리인 파주 요양원에서 생활하셨지만 5년 간은 매주 만날 수 있었다. 평생 나와 서먹서먹했던 아버지와 5년 간 매주 7-8시간을 같이 시간을 보냈다. 말로 소통할 수는 없었지만 잃어버렸던 시간을 채워갔다. 오가는 차 안에서 자주 아버지는 먹을 것을 내게 말없이 건내셨다. 전염병 때문에 요양원에 방문이 금지되고 매주 만나던 루틴이 무너졌다. 임종 2 주 전에 아버지가 일산병원에 입원하셨다.

 

어느 날 병실에 들어가다가 거대한 거인이 병실 침대에 누워계시는 것을 느꼈다. 생소하고 신기한 느낌이었다. 마지막 숨을 거두시는 밤 아버지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 시편을 큰 소리로 읽어드렸다. 22편까지 읽어드리고 소리를 내어서 기도를 했다. "위대한 인생이었다"고 내 마음에 속삭여주시는 것 같았다. 가난한 농민의 아들, 재주가 있었지만 먹고 살기 바빴던 군무원, 화물차 운전, 사고, 택시 운전.....그냥 소박했고, 술을 즐기셨고, 뇌출혈, 뇌경색.... 반신불수, 언어장애.... 곤한 인생이었다. 4명의 자식 그리고 9명의 손자 손녀를 끼쳤을 뿐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위대한 인생이었다"고 말씀하셨다.

 

 

그렇게 삶은 이어진다. 외할머니 부모님은 내게 육체를 주시고 따스함과 아픔을 동시에 주셨다. 그것은 또 말씀의 길이 되어서 내가 하나님을 만나게 했다. 내가 어른이 되었을 때 믿는 가정의 가장이 되었을 때 내게는 기독가정이 어떤 것이냐에 대한 그림이 없었다.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 지에 대해서 배운 바 없었다. 어린 시절 나는 제사와 샤머니즘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가족의 문화에서 영적으로 탈출해야 했었다. 나로서는 제사가 많은 큰 집에서 압박을 무릅쓰고 당당하게 제사에 빠지는 시위가 나를 지키는 것이었다.

 

결혼을 하고 아이들이 태어났는데 정작 내게 남편의 일상과 아버지의 일상에 대한 지혜와 지식은 없었다. 깜깜한 길을 가는 사람과 같다. 그것이 어두운 길인지도 몰랐다. 부모님의 삶의 마지막 즈음에 조금씩 조금씩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부족한 데로 내게 맡기신 아이들을 양육하는데 마음을 다했다. 그나마 다행이다. 지금 아는 것들을 10년 전 20년 전 미리 알았으면 참 좋았겠다는 생각을 한다.

 

나의 부족함 때문에 또 다른 결의 어려움을 겪는 내 아이들에게 "아빠는 기독교가정의 문화를 배우지 못했고 관련된 말씀의 실제를 체험할 기회가 없었다. 부족한 상태에서 너희들을 책임져와서 미안한 마음이 많다. 너희는 아빠보다 나아야 한다."는 말을 종종 한다.

 

 

모든 소박한 삶들은 위대하다. 학력, 건강, 재력, 지식의 눈으로 보지 않고 영혼의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면 모든 하나님의 사람이 위대하다. 그리고 이 소박한 삶은 서로에게 이어져있다. 육신과 영혼의 연결고리로 이어져있다. 어느 하나도 의미가 없지 않다. 이제 우리 삶에 더 큰 은혜를 구해야 할 때다. 한국 교회에 가정과 사랑, 부모공경, 가정에 뿌리를 내린 교육과 예배에 대한 거룩하고 실제적인 지식과 지혜가 은혜로 주어져야 한다. 우리는 열심히 구하고 배워야 한다. 삶의 길이고 하나님 안에서 인생들이 회복되고 해석되는 길이다.  

 

(가정의 힘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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