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니퍼 시니어의 <부모로 산다는 것>은 우연히 저자의 TED 강의를 듣고 알게 된 책이다. 오늘날 자녀를 키우는 것이 왜 이렇게 힘든 일이 되었는지, 역사적 관점에서 풀어가는 강의가 무척 신선했다. 뉴욕 매거진의 베테랑 기자였던 저자는 ‘ All Joy and No Fun: 왜 부모는 육아를 싫어하는가’라는 커버스토리 특집 기사를 실어서 150만 뷰 이상의 폭발적인 관심을 얻었고, 이에 수년간 추가적 조사와 연구를 통해 이 책을 썼다고 한다. 부모들에게 (또한 가정과 부모됨의 의미를 고민하는 모든 사람에게), 이 책이 던지는 질문들은 매우 현실적이다. 저자는 부모들의 솔직한 고충과 기쁨을 생애주기별로, 풍부한 현장 사례와 인터뷰를 통해 대변하면서, ‘부모의 일생’을 파노라마처럼 우리 앞에 차례로 펼쳐 보여준다.
하지만 이 책의 더 큰 미덕은 부모됨의 의미를 묻는 것에서 더 나아가, 행복의 본질, 산다는 것의 의미를 감동적으로 되묻는 데 있다. 우리 시대가 느끼는 부모됨의 고충과 역설을 충분히 공감하는 동시에, 우리 시대가 놓쳐버린 ‘오래된, 변함없는 가치’들을 제시하고 있기에, 책장을 덮고 나서도 진한 감동과 여운이 한동안 남는다. 결국 부모됨의 길은 한 인간으로 성장하는 길의 연장선에 있고, 아이들이란 존재는 우리가 더 나은 인간이 되도록, 또 그렇게 살아가도록, 우리에게 허락된 선물이라는 저자의 통찰이 깊이 와 닿기 때문이다.
이 책은 부모의 생애 주기에 따라 시간적 순서대로 각 장을 구성하고 있다. 먼저 1,2장은 육아 전쟁을 겪고 있는 젊은 부부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육아 전쟁을 격하게 겪고 있는 젊은 부부들이 특히 공감할 수 있는 장이다. 이미 그 시기를 지난 부모들도 ‘ 아, 그래서 내가 그 때 그렇게 힘들었구나’ 돌아볼 수 있다. 한 가지 눈에 띄는 점은 육아를 대하는 여성과 남성의 차이다. 젊은 부부들은 ‘누가 육아에 더 많이 참여하느냐’를 두고 신경전을 벌일 때가 많다. 그런데 저자는 여성이 남성보다 육아 스트레스를 더 많이 겪는 이유가 꼭 여성이 남성보다 육아노동의 시간과 강도가 더 높기 때문만은 아니라고 말한다. 엄마가 육아에 더 집착하고, 더 세심하게 신경 쓰기 때문에, 대충 큰 것만 보는 아빠보다 스트레스가 더 많다는 것이다.
3장은 육아의 고충을 넘어, 육아의 기쁨을 살펴보면서 아이들이 어떻게 부모를 변화시키는지를 다룬다. 그리고 C.S 루이스의 <네가지 사랑>에 기초해서, 부모됨이 ‘선물로서의 사랑’을 실천하고 경험할 수 있는 최상의 길임을 말한다. “ 우리는 아이를 사랑하기 때문에 돌보는 게 아니다. 오히려 아이를 돌봄으로 그 아이를 사랑하게 된다 ”는 격언은 아이를 낳으면 모성이나 부성이 저절로 생기는 줄 알고 있는 우리 시대 부모들이 새겨들어야 할 것 같다. 오히려 아이를 돌보는 힘든 시간을 통해 부모는 오래 참고, 자기의 유익을 바라지 않는 사랑이 무언지를 경험하고 배운다.
미국의 교육전쟁을 다루는 4장부터는 몰입도가 한층 높아진다. 최근 미국도 우리나라와 비슷한 교육 경쟁이 중산층을 중심으로 점점 가열되고 있다. 미국 중산층의 교육 경쟁 과열에 ‘타이거 맘’으로 대표되는 아시아계 이민자들이 끼친 영향을 서술하는 대목은 쓴웃음이 나기도 한다. 여기서 저자는 날카로운 문제제기를 한다. ‘ 자기 아이를 좀 더 유리한 위치에 서게 해 줄 어떤 것들에 대한 여러 믿음들은 추측과 개인적 경험의 모호한 조합을 바탕으로 구축된다’는 것이다. 일례로, 저자가 어렸을 때 미국 중산층 부모들은 미래에 경쟁력을 갖추려면 일본어를 해야 한다 믿었다고 한다. 오늘날엔 그 믿음이 중국어로 바뀌었지만, 그런 믿음이 별로 신뢰할 만한 게 아니란 사실은 오늘날 일본어가 차지하는 위치를 생각하면 금방 답이 나온다.
오늘날 미국 엄마들의 역할이 ‘일정 조정자, 잔소리꾼’이 되어간다는 분석은 우리나라의 현실과도 비슷하다. 다른 점은 미국 부모들은 공부보다 운동을 더 많이 시킨다는 점이다. 미국 부모들이 자녀들의 숙제를 봐주느라 저녁 식사 시간을 빼앗기고 있다는 것도 한국과 다르다. 한국은 학원이 그 모든 걸 블랙홀처럼 삼켜 버린다. 저자는 요즘 부모들이 이런 역할들을 떠맡는 이유가 ‘아이들의 행복’ 때문이지만, 정작 이전 세대 부모들은 아이들의 ‘행복’에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고 강조한다. 그저 먹여주고 입혀주고, 옳은 일을 하라고 가르치고 세상의 거센 파도에 준비시키면 그걸로 충분했다. 그에 대한 대가로 아이들은 가족에 노동력을 제공하고 책임 있는 역할을 감당했다. “아이가 가족 내에서 보다 구체적인 역할을 가지고 있다면 부모는 아이들을 행복하게 만들려고 미친 듯이 날뛰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저자는 말한다. 문제는 우리가 “ 자녀들이 어떻게 행동하길 바라는지 확신이 없고, 자녀 교육의 궁극적인 목표가 무엇인지 스스로 확신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이 책의 클라이막스는 사춘기 아이들을 다루는 5장과 행복이란 무엇인가를 묻는 6장이다. 사춘기 아이들이 어떻게 부모를 배신하고, 격렬하게 부모와 싸우고, 어처구니없는 사고를 치고, 부모를 무시하는지 보면, 왜 부모들이 SNS에 사춘기 자녀들 이야기를 올리지 않는지, 왜 사춘기 자녀를 둔 부부들이 더 많이 싸우는지 알 수 있다. 한 가지 역설은 자녀가 그토록 부모에게 등을 돌리는 시기에, 오히려 가장 많은 부분에서 부모의 자산과 지지와 도움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이다. 또 저자는 사춘기 아이들의 충동적 행동들이 낯설기 때문이 아니라, 부모와 너무 닮았기 때문에 부모들에게 더 큰 공포를 준다고 지적한다. 그럼에도 사춘기 아이들은 부모가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보고, 무엇을 위해 남은 삶을 살아야 할지 재조정하게 만든다. 자녀들의 반항이 부모를 더욱 성숙하게 한다는 것이다. 사춘기 자녀들과 힘든 터널을 지나왔고 여전히 지나고 있는 한 어머니는 이렇게 고백한다. “ 너희들을 낳고 키웠다는 게 내가 지금까지 한 일 가운데 가장 멋진 일이야. 그래서 나는 ... (그녀는 갑자기 울기 시작했다) 나는 우리 아이들이 얼마나 자랑스러운지 몰라요. ”
이런 부모됨의 역설을 저자는 6장에서 ‘경험하는 자아’와 ‘기억하는 자아’로 나누어서 설명한다. 기억하는 자아가 경험하는 자아보다 우리를 더 많이 지배하는 데, 기억하는 자아는 경험하는 자아보다 현실을 더 아름답게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아이 키우는 일이 왜 이렇게 힘드냐고 불평하는 젊은 부모들의 ‘경험하는 자아’는, 얼마 후 아이의 어린시절이 눈부시게 아름다웠다고 회상하는 ‘기억하는 자아’로 대치될 것이다. 결국, 아이를 키우는 과정에서 부모도 계속 성장한다. 부모로 산다는 것은 끊임없이 누군가의 필요를 돕는 인간됨의 의무를 다하는 것이고, 무슨 일이 닥쳐도 해야 할 일의 목록을 가지게 되는 것이고, 인생의 정점과 바닥을 거치며 삶의 복잡성과 풍성함을 배우는 것이다. 그것이 인생이고 우리가 살아가야 하는 삶이다. C.S 루이스가 가장 고차원적 사랑으로 분류했던 ‘선물의 사랑’을, 부모는 아이를 키우면서 배우고, 경험하고, 그 과정에서 성장하고 빛을 발한다는 것이 저자의 결론이다.
제니퍼 시니어는 자신을 비종교인(?)이라고 살짝 밝히지만, 이 책을 읽는 내내 기독교적인 메시지와 가치가 곳곳에서 묻어남을 느낄 수 있다. (성경의 가르침과 영향력이 여전히 곳곳에 울리고 있는 미국사회라 가능한 일인 듯하다.) 우리는 흔히 부모의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닮았다고 한다. 하지만 부모가 처음부터, 저절로 그런 존재가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토록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의존되어 있는 아이들이 부모 된 우리를 그런 존재가 되어가도록 초대하고, 도전하고, 성장시켜 준다는 점에서, 부모됨은 은혜이고 선물이다.
오늘날 크리스천 부모라고해서 육아전쟁, 교육전쟁, 사춘기 자녀와의 갈등, 행복이란 목표를 향해 브레이크 없이 달려가는 것 등에서 예외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기독교 가정의 부모라면, 저자가 오늘날 부모들이 놓치고 있다고 평가한, ‘변함없는 가치’에 깊이 헌신되어 할 것이다. 시대의 조류에 따라 흔들리고 표류하는 세상의 부모와 달리, 자녀들을 어떻게 키워야 한다는 분명한 목표를 확신해야 할 것이다. 그 목표는 자녀들의 행복, 성취, 안정, 그 어느 것도 아니다. 오직 한 가지 책, 성경에 제시된 그리스도의 진리를 따르는 것이다. 저자의 TED 강연도 “ 우리는 수많은 육아서들과 다 소화할 수도 없는 육아 정보들이 더 필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 부모님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저 한 권의 책만으로 충분한지 모릅니다. ” 라고 결론을 맺는다. 저자는 물론 그 책이 성경이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크리스천 부모라면, ‘네, 성경만으로 충분합니다! ’ 라고 확신할 수 있고, 마땅히 그래야 할 것이다.
나는 부모로서 어떤 목표를 가지고 자녀를 키우고 있는지 돌아본다. 끊임없이 내 약점과 한계를 비춰주고, 내 에너지를 고갈하게 만들고, 낙심과 기쁨 사이를 오가게 만드는 이 아이들을 통해, 부모인 내가 죽는 날까지 그리스도를 향해 자라갈 것이라는 소망과 감사가 생긴다. 우리 아이들을 그리스도의 빛 된 다음 세대들로 기르는 일을 끝까지 감당하고 헌신하라는 격려도 받는다. 진정한 행복은 미친 듯이 나와 내 아이들의 행복을 신기루처럼 쫓아가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내 자녀에게 소중하고 의미 있고 변함없는 가치를 물려줄 수 있도록, 오늘 내가 감당해야 할 일상의 씨름들과 긴장을 놓지 않고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끌어안는 과정 속에, 행복은 마치 파랑새처럼, 어느새 우리 가까이 있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서지현 사무국장 (가정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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